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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검은 열기의 문화 코드, 힙합 속 디자인

… Don’t push me cause I’m close to the edge I’m tryin’ not to lose my head Its like a jungle sometimes It makes me wonder how I keep from going under
… 밀지 마, 나는 벼랑 끝에 있으니까 정신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니까 내 삶은 때론 정글 같아 어떻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야

– 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 the Message(1982)




사진1

사진2
지난 2월 5일 제65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힙합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연식은 있어도 여전히 건재한 유명 래퍼들이 대거 출연해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힙합의 위상을 확인시켜줬다. 힙합은 이미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 대중문화의 커다란 맥을 차지하고 있다. ‘흑인 문화’라고 한정 짓기에는 다양한 계층과 집단에서 힙합 문화 코드를 차용하고 있으며,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패션, 춤, 예술 외에 말투, 몸짓까지 힙합 문화가 우리 일상에 토착화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케이팝의 근본에서도 미국 길거리 문화의 DNA를 찾을 수 있다. 춤과 안무, 비트박스, 랩 배틀, 비보잉…(아이돌 멤버 중 한 명이 꼭 래퍼라는 사실!). 힙합이 없었다면 한류가 가능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MoR의 마지막 칼럼으로 힙합의 문화 코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힙합과 랩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전방위적으로 끼친 영향에 대해, 특히 시각 문화를 조명해보자.

힙합은 근본부터 안티다. 기성세대나 체제에 반대하는 성향을 ‘안티’라고 통칭한다면, 그것을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 힙합이라 하겠다. 음악 자체도 멜로디 없이 거의 낭독하는 형식의 랩, 악기라고 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레코드 ‘스크래칭’, 다른 음악을 부분적으로 따와서 재생하는 ‘샘플링’은 모두 차용과 도용에서 비롯된 음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미국 흑인들이 겪은 노예제도, 백인 우월주의자의 인종차별 정책, 요즘 다시 일고 있는 유색인종 혐오 사건으로부터 랩과 힙합이 시작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태생 자체가 반제도적이며 주류에서 배척된 언더그라운드 문화인 것이다. 디자인으로 치자면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안티 디자인’의 흐름과 그 맥락이 유사하다. 당시 디자이너들도 디터 람스의 굿 디자인 십계를 법칙이 아닌 취향으로 여기고 디자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에 집중하며 주류에서 말하는 소위 ‘좋은 디자인’의 가치를 거부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힙합의 앨범과 로고 디자인 곳곳에서 차용과 원작자의 모호함, 의미의 전복 등 안티 디자인의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사진 1사진 2는 같은 디자이너의 작업이 아니다. 사진 1은 1980년대 미국 랩과 힙합을 대표하는 그룹 런 디엠씨Run DMC의 로고(1986)이며 사진 2는 디자인 전공생에게는 거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건축·디자인 비평가 레이너 밴험Reyner Banham의 〈제1 기계 시대의 이론과 디자인〉(1960) 표지이다. 누가 누구를 ‘샘플링’했는지는 시간이 말해준다. 흥미로운 점은 둘 사이의 문화적 괴리다. 따분한 디자인 이론 서적이 길거리 시인들의 영감의 근원이 된 것은 재미난 사실이다. 최근에서야 스테퍼니 내시Stephanie Nash라는 디자이너가 런 디엠씨의 로고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와 관련한 설이 너무 많아 정확한 크래디트를 확인하기 어렵다.(이조차 ‘안티 디자인’에 가깝다고 할까?)



사진3

사진 4
흑인 인권 운동의 무장화를 주창한 1980~1990년대 대표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로고(사진 3)도 예사롭지 않다. 사격 조준경에 있는 목표물은 분명히 사람이지만, 당당히 팔짱을 끼고 있어 미국 역사 속 흑인들의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디자인임에 틀림없다.

이는 그룹의 리더 격이자 래퍼인 척 디Chuck D가 디자인한 것인데 그가 소외 계층을 대변하는 목소리이기 이전에 그래픽 디자이너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퍼블릭 에너미 못지않게 악명 높은 힙합 그룹 N.W.A.는 갱스터 랩의 원조로 마약을 권장하거나 경찰을 죽이라는 등 선동적이고 과격한 가사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닥터 드레Dr. Dre, 아이스 큐브Ice Cube, 이지-이Eazy-E 등으로 구성된 N.W.A는 기성 세대를 타파하자는 메시지를 앞세우며 1990년대 힙합 신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들의 로고(사진 4) 디자인은 다소 뜻밖이다. 이들이 사용한 폰트는 프랑스 디자이너 로제 엑스코퐁Roger Excoffon이 1953년 디자인한 미스트랄Mistral. 유럽에서 향락의 극치를 상징하던 서체다. 디자인이 기존에 지닌 맥락과 상징성에서 탈피해 하층민을 대변하는 분노의 목소리와 조응했다는 아이러니 역시 안티 디자인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앞서 소개한 사례들 사이에서 공통 분모나 개연성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특징 자체가 힙합이 안티 디자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헤비메탈 밴드를 떠올려보라. 과격할지언정 저마다 통일된 로고나 앨범 아트를 사용한다. 펑크 밴드들은 지금까지도 벼슬 머리에 징 박힌 가죽 재킷으로 한눈에 정체성이 드러나는 비슷비슷한 외모를 고집한다. 하지만 힙합에서는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자기만의 색깔과 정체성을 추구한다.





모스 데프Mos Def의 솔로 데뷔 앨범 〈Black on Both Sides〉(1999) 커버.
메탈이나 펑크에서 ‘합류’나 ‘연대’가 주를 이룬다면 힙합은 그 반대로 다양성과 개인의 생각,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겨 일관성을 거부하고 매번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현재 예슬린 베이Yeslin Bey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모스 데프가 있다. 데뷔 당시 모스 데프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활동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엠에프 둠 MF DOOM(반드시 대문자로 표기해야 한다)도 마찬가지다. 그는 2020년 사망 전까지 제브 러브 엑스Zev Love X, 킹 기도라King Geedorah, 빅토어 본Viktor Vaughn, 메탈 핑거스Metal Fingers, 메탈 페이스Metal Face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했다. 전통적인 브랜드 디자인 관점에서 일관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상기해볼 때 이를 역행하는 힙합의 파편성 역시 안티 디자인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어쩌면 힙합 가수들이 패션에 집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지 모른다. 심지어 엘엘 쿨 제이LL Cool J, 제이지Jay-Z, 피 디디P. diddy,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는 아예 패션 브랜드까지 만들며 자신의 힙(합)을 과시했다. 아디다스와 조던 나이키, 캉골, 팀버랜드, 슈프림, 노스페이스 같은 브랜드, 최근에는 구찌, 샤넬 등 럭셔리 브랜드까지도 힙합 패션을 차용해 매출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이 옷차림의 근원도 사실 미국 교정 시설 수용자들의 문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는 힙합이 늘 주류에서 벗어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의 개성을 고수하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것. 힙합의 패션과 시각 문화는 이성으로 분석하기 전에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힙합 음악과 닮았다.



매드빌런Madvillain의 〈Madvillainy〉(2004) 커버.
하지만 시간 앞에선 모든 것이 무색해지는 것 같다. 쉰 살이 넘은 힙합은 이제 여지없이 주류 음악에 속한다. 한때 흑인의 목소리였던 제이지는 백인이 주를 이루는 세계 갑부 대열에 합류해 흑인의 고충과 비애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거리의 시인이었던 스눕 독과 닥터 드레 역시 1%의 억만장자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듯 힙합을 더 이상 ‘흑인 문화’라는 프레임 안에 가둘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양한 계층과 집단에 차용되고, 케이팝 등 신흥 주류 문화와 조응하기도 하면서 외연을 넓혀가는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전 세계 저항과 시위의 BGM으로 쓰이며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1990년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에서 퍼블릭 에너미 음악이 양쪽 진영에서 울려 퍼졌고, 2007년 케냐의 힙합 듀오 기디 기디Gidi Gidi와 마지 마지Maji Maji는 힙합 리듬에 맞춰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였으며, 튀니지의 래퍼 엘 제네랄El General이 2010년 발표한 곡 ‘Rais Lebled’는 튀니지 봉기 기간에 불리며 ‘아랍의 봄’의 주제가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세네갈, 칠레, 수단, 미얀마, 가자 지구, 이란에서까지 민중의 사운드트랙에서 십중팔구 힙합이라는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불평등, 차별, 억압이 인류 역사에 존재하는 한 힙합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MoR(Master of Reality)
블랙 사바스에서 만나 화이트 라이온에서 갈라진 록·메탈광들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황규철과 디자인 저술가 박경식이 결성한 프로젝트 동아리. 두 사람은 서울, 인천, 경기, 오사카, 교토, 도쿄, 토론토, LA, 베를린까지 바이널을 디깅하면서 나눈 음악과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유튜브에서 ‘MoR(엠오알)’을 검색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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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MoR 담당 박슬기 기자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