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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News
이인위미里仁爲美

작년 말 팔자에도 없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해외에서 잠깐 아파트에 산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는 부모에게서 독립 후 첫 아파트 생활입니다. 얼추 반년 정도 지났는데 삶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입니다. 전형적일지언정 깔끔한 주거 공간, 다양한 편의 시설, 편리한 디지털 시스템…. 출퇴근 때마다 안구를 고문하는 단지 조형물만 제외하면(도대체 주민들과 무슨 원한 관계가 있길래 저런 걸 만들었을까 싶습니다) 그럭저럭 괜찮다고 여겨집니다. 확실히 국내에선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사용자에 맞게 진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20세기의 명제는 이 나라에 수입되어 ‘집은 살기 위한 상품’이란 명제로 현지화됐습니다.

10여 년 만에 아파트 산책자로 돌아온 제게 가장 생경했던 것은 앱 기반의 커뮤니티 플랫폼입니다. 일종의 디지털 반상회라고 할 수 있는데, 각종 사안에 대한 논의가 여기서 이뤄집니다. 입주자 대표를 뽑거나, 분리수거 날짜를 정하거나, 단지 내 시설을 자체 운영할지 아니면 위탁 운영할지 투표에 부친다거나. 알아두면 유익한 지역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는데 수년간 이웃과 말 한 번 섞기 힘들었던 예전 아파트와 비교하면 분명 달라진 풍토입니다.

요즘 아파트를 흔히 수직 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하죠. 그저 그런 마케팅 용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진짜 마을 하나가 형성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주 전에는 누군가 정해진 분리수거 날짜가 아닌 날에 택배 상자를 버려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다수결로 정한 원칙을 위배한 입주민에게 많은 이들이 분노했고, (다행히 호수는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택배 상자에 붙은 스티커를 촬영해 공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런 걸 잘 지켜야 명품 아파트가 되고 집값도 오르는데.” 잘잘못을 떠나 이런 조리돌림을 보면서 ‘이게 바로 스몰브라더 사회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명품 아파트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도 조금은 이해가 가더군요. 대한민국에선 많은 사람이 평생 일하며 번 돈을 집에 쏟아붓습니다. ‘평생 일해 아파트 한 채 남겼다’는 말에는 자조와 자부심이 함께 담겨 있죠. 즉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란 개인의 자산 그 자체이고 더 나아가 사회적 신분과도 직결됩니다. “이런 걸 잘 지켜야 명품 아파트가 되고 집값도 오르는데”라는 말속에 신분 상승의 욕구와 더불어 힘들게 배팅(?)한 자산을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이 상황이 조금은 애잔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 주거 양식을 선호하든 아니든 아파트는 이처럼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대변합니다. 도시와 개인, 가치관과 이데올로기, 제도와 사회 시스템. 물론 디자인과 건축, 미감의 문제도 얽혀 있죠. 특히 이번 호에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이 쓴 ‘욕망의 규칙, 아파트 게임’을 읽어보면 아파트라는 주거 형식이 우리의 디자인 체계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굿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번 호 주제인 아파트는 이상하게 치켜세울수록 분양 팸플릿 같아지더군요) 분명 아파트도 디자인의 범주에 일정 부분 들어와 있고, 이것을 다뤄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자인이 아파트를 파놉티콘 빌리지가 아닌 건강하고 인자한 공동체로 만드는 데 일조할 순 없을까요? 단지의 보이지 않는 빗장을 열고 도시와 호흡하는 방법은 정녕 없을까요? 이번 호가 여기에 대한 답을 줄 순 없지만, 최소한 생각할 거리는 던져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들도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제대로’ 들여다보기를 바라고요. 안구 테러에 가까운 단지 조형물을 만드는 데 불필요한 힘을 쏟는 대신 말이죠.


(*)이인위미里仁爲美: ‘인자함이 머무는 마을이 아름답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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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글 최명환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