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요즘 뷰티업계의 스몰 브랜드 신을 압축하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이 떠오른다. 몇 년 사이 스몰 브랜드의 론칭이 범람했고, 규모와 관계없이 개인의 취향과 감도로 승부가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단단한 무기만 있다면 다윗도 상대해볼 만큼 기회가 많아졌달까. 작은 브랜드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사소한 이슈를 공유하고 소통하며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으로 ‘ 자기다움’을 마음껏 펼친다. 메이저 브랜드가 잘하지 못한 ‘틈새’를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공략한다.
무엇보다 스몰 브랜드의 시작엔 ‘메이커’가 있다. 국내 스몰 뷰티 마켓은 10년 전 할리우드에서 셀럽들의 뷰티 브랜드 론칭이 대박 난 데 이어 후속 주자들이 뛰어들며 유행이 시작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형성되었다. 리아나, 카일리 제너, 제시카 알바, 귀네스 팰트로 등이 럭셔리 브랜드의 모델 자리를 내려놓고 자신만의 철학과 노하우를 담은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파도는 전 세계적으로 뷰티 지형의 판도를 바꾸고 ‘스타가 만든 브랜드’와 더불어 ‘인디 브랜드’를 유행시켰다. 아마존이 3년 전부터 ‘인디 뷰티’ 카테고리를 열고 다양한 브랜드를 폭넓게 소개하고 있는 점도 열풍을 반영한 결과다.
국내에서는 2018년부터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스타트를 끊었다. 그 후 감각이 뛰어난 숨은 강자들이 궤도에 진입하며 마켓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스몰 브랜드가 단순 고객을 넘어 팬덤을 형성할 수 있는 배경엔 브랜드 메이커가 가진 고유한 안목과 취향, 기존 제품의 한계를 경험하고 페인 포인트를 투영한 내공과 설득력에 있다. 스몰 브랜드의 초창기는 온라인 자사 몰을 중심으로 독립적 운영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유통망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기보다 브랜딩과 고객 경험에 더 집중하는 전략이다. 대기업 태생의 메이저 브랜드는 많은 팀의 협업과 보고를 거쳐 제품 출시까지 호흡이 긴 반면, 스몰 브랜드는 메이커의 추진력과 빠른 의사 결정에 따라 전개되기에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요즘 시대엔 스타트업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는 셈이다. 스몰 브랜드의 메이커들은 현재의 불편을 해소하고, 지향하는 가치를 스피디하게 향유한다.
MZ세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환경, 비건, 동물 관련 이슈를 제품의 성분과 패키지, 키 비주얼에 빠르게 접목한다. 동물성 원료와 유해 성분을 식물 성분으로 대체하며 ‘비건 브랜드’로 혜성처럼 나타난 멜릭서Melixer의 성공이 그랬다. 멜릭서의 이하나 대표는 식물성 화장품을 사용하며 피부 문제가 개선된 개인의 경험과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비건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 결과 매해 폭풍 성장을 기록하며 스몰 브랜드에서 메가 브랜드로 몸집을 키웠다. 감각적 비주얼로 성장한 힌스Hince와 논픽션Nonfiction은 한마디로 붐을 일으킨 케이스다. 힌스는 일본 모델 타치바나 에리의 생경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담은 룩북으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그녀를 발탁한 메이커의 안목이 신의 한 수였다. 예사롭지 않은 구도의 제품컷, 반짝반짝 빛나는 발색의 영상 콘텐츠가 계속 터지면서 디지털 마케팅의 성공 신화를 그려나갔다.
스튜디오 콘크리트 출신인 논픽션의 차혜영 대표는 취향 좋기로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향수 마니아인 그녀는 그간 수집해온 고가의 니치 향수를 합리적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주목했고, 30ml 포켓 사이즈 향수로 가격 장벽을 6만 원대로 낮춰 가심비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20~30대 여성이라면 생일 때 논픽션 핸드크림을 한 번쯤 받아봤을 텐데 카카오톡 선물하기 플랫폼에서 논픽션 핸드크림의 위상은 그만큼 독보적이다. 파워의 동력은 다름 아닌 패키지 디자인. 아트먼트 뎁의 김미재 대표가 론칭한 티컬렉티브TEA Collective 홈케어, 프린트 베이커리의 아트 디렉터 출신 김소형 대표의 알보우RboW, 정다연 대표의 누텍스처NuTexture도 개성 있는 패키지로 팬덤을 형성했다.
스몰 브랜드 열풍은 흥미롭게도 피부과, 한의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병원이 더모 코스메틱 브랜드를 매입해서 판매했다면, 최근엔 대표 원장의 연구와 노하우를 집약한 ‘우리 병원만의 화장품’을 전면에 내세운다. OEM 제조사가 요구하는 최소 생산량에 따른 투자비를 고려하면 이전의 위탁 판매 방식이 더 효율적이겠지만 마진보다 병원 브랜딩의 확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개성 있는 브랜드가 많아지는 현상은 실로 유쾌한 경험이다. 누군가의 유니버스를 보는 맛이 있달까? 취향 좋은 이들의 전쟁이 잠잠해진 K-뷰티의 전성기가 다시 오게 할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글로벌 리그에서 뛸 수 있는 든든한 홈런 타자들은 지금 한국에 가장 많다.
〈헤렌〉 〈노블레스〉 매거진의 뷰티 에디터로 트렌드 취재와 광고 메이킹을 맡았다. 인테리어 스타트업 아파트멘터리에서 라이프스타일 PB 브랜드를 론칭하고 타월 브랜드 그란(The Grann)의 성장을 리드했다. 현재는 작은 브랜드의 마케팅에 주목하는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 Design Essay 지금 한국의 스몰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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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취향과 감도로 승부가 가능한 시대다. 글로벌 리그에서 뛸 수 있는 든든한 홈런 타자들은 지금 한국에 가장 많다.”Share +바이라인 : 박은아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