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언제 어디서든 도서관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식으로. 평범해 보이는 부부가 있는데 말이지, 그 부부는 아이를 낳고 이런저런 어려움과 슬픔 그리고 그보다 짧은 찰나의 행복을 함께 나누고 수십 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아이들은 자라고 그러던 어느 날 말이야, 스스로 부인이라 생각 하는 여자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환상임을 깨닫고 자신은 누군가와 함께 산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그런 소설 말이야. 그거 무슨 소설이었지? 문득 어떤 책이 읽고 싶어지고 그에 대해 생각하며 한참 고민하다 보면 도서관은 주어진 정보로 재빠르게 해당하는 소설을 찾아내어 “아, 그 소설은 21세기 미국 작가 누구의 소설이군요” 하고 책을 건네거나 아니면 “그 소설은 당신의 착각이군요. 그런 소설은 없지만 그런 조합으로 비슷한 소설을 만들어보았는데 이게 그 소설입니다”라는 식으로 만든 책을 건네는 도서관.
예전에는 그런 정보와 자료의 조합으로만 움직이고 만들어지는 도서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런 도서관은 사라졌다고 해. 사라진 이유는 글쎄 뭐 한 사람이 떠올리는 것은 대개 뻔할 때가 많으니까 늘 읽던 책을 또 읽거나 읽었을 법한 것만 떠올리다 보니 새로운 책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고 그렇게 책이라는 것에 시들해지다 보니 그런 도서관이 사라졌던 것이고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나 도서관을 만드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오갈 수 있는 도서관이라는 건물이 하나 있는 편이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곳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는 쪽이 여러모로 힘이 덜 드니까 그런저런 이유로 언제 어디서나 만들 수 있었던 도서관은 곧 사라졌다고 해.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랬다. 이유야 어떻든 나는 도서관에 가고 도서관에 일단 가면 뭔가 괜찮아지는 기분이 된다. 내가 주로 가는 도서관은 서대문도서관인데 그 곳 2층에서 밖을 내려다보면 도서관과 붙어 있는 중학교에서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서대문도서관은 정독도서관 같은 크고 오래된 곳보다는 규모가 작고 역사도 짧지만 그래도 백 년이 훌쩍 넘은 도서관이고 여전히 사람들은 책장 사이를 서성대기 위해서 혹은 미리 골라둔 필요한 책을 읽기 위해서 혹은 갈 곳이 없어서 돈을 내지 않고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주는 곳이 필요해서 도서관에 간다. 갈 곳이 없는 사람들. 갈 곳이 없는 돈이 없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도시에서는 서울에서는 점점 줄어드는데 그러나 혹은 그래서 도서관이 있는 것이다.
언제였더라 몇 해 전 여름 나는 돈도 별로 없고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에 갔다. 무더운 여름 더워지기 전 오전에 도서관에 가 몇 시간이고 앉아서 추리소설을 읽었다. 배가 고프면 가져온 빵을 지하 매점에 앉아 먹거나 매점에서 밥을 사 먹었다. 그러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 도서관 2층 창으로 나무를 보고. 나무는 푸르고 그것을 오래도록 보아도 좋았다. 그때 읽었던 소설들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고 책들은 가끔 정말로 스쳐 지나가고 사라져버리기도 하는데 마치 3년 전 먹은 점심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 식사는 내 배를 채워주었고) 그렇게 사라져버린다. 어쨌거나 갈 곳 도 갈 수도 없을 때 나는 그때 도서관에 있을 수 있었다.
어디서든 사람의 머리 위로 도서관이 만들어졌을 때 그때는 물론 그 전부터도 서울은 도서관을 없애기도 하고 거리의 벤치를 없애기도 하고 대학교의 빈 공간을 없애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렇게 한 것일까? 서울시장이 그렇게 한 것일까? 어쩌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도 집이 없는 사람이 벤치에 누워 자는 건 싫어 그런 걸 보고 싶지 않아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냄새 나는 것과 더러운 것은 보고 싶지 않아 눈앞에 깨끗한 새것만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아무튼 서울은 앉을 곳을 없애고 또 없애고 그러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벤치에서 잘 수 없고 지나가는 아무나도 벤치에서 잘 수 없고 대학생들은 아무 데나 앉아 있을 수 없고 학교 안에서 돈을 내고 커피를 마시고 돈을 내야 어딘가에 있을 수 있었는데 물론 지금이라고 그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서울에서 사람들은 돈을 내고 돈을 내고 또 돈을 내야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데 도서관 2층 창으로 중학생들이 농구공을 튕기는 모습은 잠깐 그런 생각을 멈추게 하고. 어떨 때 농구장은 텅 비어 있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저 그 주변을 웃으며 뛰기도 한다. 그냥 마구 뛰는 아이들. 교문으로 갔다가 반대편으로 갔다가 갑자기 내기를 하며 앞지르려고 빨리 달리는 아이들. 져도 웃고 이겨도 웃는 아이들을 보다가 아 가끔 어딘가에 있기 위해 돈을 내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피곤하게 느껴진다. 가끔은 의식도 안 되고 그저 해버리는 일이지만 또 어떨 때는 돈을 낸다는 일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도서관 책장 사이로 간다. 어떤 구석은 정말로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도 오지 않고 영원히 안전할 것 같다. 그런 구석으로 가서 옛날 사람들 그럼에도 지나치게 생생하고 안타깝고 불쌍하고 때로는 즐겁고 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옛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나를 좀 더 편안하고 용감하게 만든다.
그렇게 도서관에 가다 보면 이곳에 매일같이 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이곳에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 도서관임을 알게 된다. 책이 있고 오래된 책이 있고 책상과 의자가 있는 도서관이 필요하다. 갈 수 있고 가서 앉을 수 있는 도서관이 필요하다. 아마 언제 어디에서나 만들어지던 도서관은 그래서 곧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울 때 추울 때 돈이 없고 앉아 있고 싶을 때 가만히 숨고 싶을 때 유리문을 밀고 들어갈 도서관이고 지금(지금이 언제라도) 서울에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도서관이니까.
소설가.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우리의 사람들〉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장편소설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미래 산책 연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