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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Essay 100년 전 10월에 김소월의 '산유화'가 <개벽>에 발표되었듯이

100년 후를 생각한다는 것은 100년 동안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앞으로 남은 2023년의 몇 달부터 시작해, 2024년에서 2123년까지의 하루하루를. 이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100년 후의 모습이 된다. 100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100 년 후를 생각했을 것이다. 1923년 여름날 누군가가 100년 후의 서울을 상상했을 것 이다. 1923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5년이었다. 1월 1일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개명 되었다. 5월 15일에는 평양 시내에 전차가 시운전을 실시했다. 6월 11일에는 경성무선전신국이 설치되었다. 8월에는 조선 전역에 심한 폭우가 발생했다. 9월 3일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이 일본 천황 암살 기도 혐의로 검거되었고, 10월에는 김소월의 ‘산유화’가 〈개벽〉에 발표되었다.

그해로부터 100년 후, 2023년은 위키백과가 어떤 이야기로 채우게 될까.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1923년에 내가 이 세상에 아직 없었듯이 2123년에도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한 인간이 이 세상에 거주하는 기간은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짧다. 반면 100년이라는 시간은 어마어마하다. 100년 후인 지금도 여전히 여름이면 폭우가 내리고, 재해가 일어나고, 누군가가 죽고 많은 것을 잃는다. 올해 10월에는 김소월의 ‘산유화’처럼 길이길이 남을 누군가의 시 한 편이 세상에 발표될 가능성도 있다. 100년 후에도 그런 일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검색창의 한 지식백과에서는 ‘촌락과 더불어 인간의 2대 거주 형태이며,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활동의 중심이 되는 장소’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을 촌락과 도시로 구분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촌락과 도시를 구분하는 요소는 인구 밀집의 정도일 것이다. 도시라는 호명에 깃든 욕망에는 아마도 당연한 듯 막연한 듯 소도시를 배제하는 경향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에서 서울의 100년 후를 상상하는 일은 어떻게 유의미한 것이 될까. 서울의 100년 후가 아니라 어느 촌락의 100년 후를 상상해 보는 것이 어쩌면 100년 후의 우리 모습을 더 정확하게 추출하는 관점은 아닐까. 언젠가부터 서울을 너무 뻔한 도시라고 여겨온 나 같은 사람은 서울의 100년 후마저도 뻔하게 상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100년 후의 서울이 아니라 100년 후의 촌락에 대해서라면, 매우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로 인해 그 방향을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워 유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서울은 사전적 정의대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활동의 중심’이 되어왔다. 100년 전 쯤부터 지금껏 그 역할이 가속화되고 비대해져왔다. 사전은 ‘활동의 중심’이라는 중립적인 말로 서울에 부여된 권력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계와 편중이 심화되어 계급사회를 재현하는 장소가 곧 서울이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의 시민의 삶은 ‘인-서울’과 ‘탈-서울’로 구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 지인들의 삶을 지켜보면 특히 그러하다. 대학 진학을 기점으로, 혹은 대학 졸업 이후를 기점으로 먼 도시로부터 상경을 한다. 지하 방 아니면 옥탑방 같은 원룸 생활자로 살아가다가 집 장만의 열망이 짙어갈 즈음에 수도권 어딘가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출퇴근 시간을 담보하기만 한다면 훨씬 윤택한 공간에서 ‘스위트 홈’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아예 제주도처럼 이상적인 자연환경을 향해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에 없는 것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우리의 서울에는 무엇이 없는가.

서울에 없는 것은 서울에 있는 것보다 과연 많을까. 서울에 없는 것이 다른 지역에는 있을까. 서울에 없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나 자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탈-서울’을 결정한 사람들이 가장 되찾고 싶고 누리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으로서의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인-서울’을 도전하는 사람들이 가장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거의 모든 권리를 얻고 싶어 한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보다 용이하게 쟁취할 수 있는 삶이 서울에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서울 시민들에게는 있다. 실제로 ‘인-서울’이라는 행위만으로도 얻어지는 권리가 있기도 하지만, 진짜 원하는 권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노력하고 희생하고 인내한다. 이 과정을 이미 겪고 쟁취한 이후이거나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은 경우에 ‘탈-서울’의 결정이 이루어진다. 쟁취했든 그러지 못했든 더 이상의 희생은 생의 낭비라는 판단이 지배적인 탓이다.

100년 후의 서울에 녹지가 많아지고, 저탄소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 등 친환경적인 모양새를 갖춰나간다는 상상은 어쩐지 쉽게 가능해진다. 서울은 언제나 급진적으로 변화해왔기에, 자본과 과학기술이 서울을 가장 먼저 친환경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건 당연한 일일 뿐이다. 적어도 외양만큼은 변하고 싶은 그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다. 쓰레기 배출을 비롯해서 저탄소를 목적으로 하는 도시 생활의 규제도 가장 급진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생활하는 데에 따른 모든 비용은 더 커질 것이다. 생태적 윤리가 비용을 치를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계급이 더 선명해지지 않을 가능성을 도시 설계자들은 얼마나 염두에 둘까.

몇 년 전에도 미래의 우리 모습을 예측하는 글을 요청받아 2030년 1월 1일의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정점이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의 삶이 과학기술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더 나아지는 쪽이 아니라, 마치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펼쳤다. 제일 먼저 생각해본 것은 과연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전기 사용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 대해서 묘사했다. 인류가 에너지 고갈을 적극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장면들을 상상했다. 내가 아는 가장 급진적인 결정을 상상해본 것이다. 서울은 100년 후에 스스로 낙후를 결정할 때만 가장 앞서가는 대도시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앞서가기 위해 친환경 도시로 변모되기 위하여 이런저런 기술력을 동원하며 진화에 대한 노력을 한다면, 어쩌면 가장 낙후한 도시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를 출간했고,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 〈나를 뺀 세상의 전부〉 〈그 좋았던 시간에〉 〈어금니 깨물기〉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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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 김소연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23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